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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골한옥 10-03-03 10:19 | |
힘 못쓰는 봄눈 조회수 : 5,028 | 추천수 : 0 | |
경인년 초봄인 3월 초하루를 축하하려는지 새벽부터 폭설이 내렸다. 강릉은 늘 3월 초 학교가 개학할 즈음엔, 이렇게 폭설이 내리곤 한다.
한참 냅다 쏟아지고 있을 때에는, 걸어 다닐 수가 없을 정도이다. 무르팍에 눈이 차여서 앞으로 걸어갈 수가 없다. 특히 눈을 뜰 수가 없어서, 앞만 보고 무작정 걷다보면, 걷던 길은 온데간데없고, 흰 들판 한 가운데 혼자 서있기가 일쑤이다. 다시 돌아 왔던 길을 돌아간다고, 딴에는 열심히 뛰어 갔는데, 얼마쯤 지났을까, 눈을 떠 보니, 아뿔싸, 아까 그 자리인 것 같다. 눈은 계속해서 퍼붓고 있고,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다. 춥고 발은 시리고, 얼굴은 눈발을 맞아 새빨개졌다. "사람 살려 달라"고 소리 쳐본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눈은 점점 더 퍼부어 무릎 위 20cm까지 올라 왔다.
정신이 혼미해져 온다.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차리자.
민가도, 바위도, 언덕도, 모두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다. 마을 중간쯤에 있는 큰 미루나무이다. 여름에는 나팔꽃이라고 하는 능소화가 만발하던, 오래된 고목나무 그 미루나무! 바로 그것이 생각났다.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어슴푸레 보이는 그 미루나무를 향해, 논둑이건, 개천이건, 언덕이건, 아무 생각 없이 그 미루나무를 향해 걷는다.
한참을 걸었는데 움푹 팬 논둑에 걸려 엎어졌다. 눈 속에 파묻혔다. 일어 날수가 없다. 힘이 없어져 간다.
정신을 차리자.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겨우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해 미루나무가 보이는 곳으로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미루나무는 개천을 건너 큰길과 접해있는, 큰 기와집 화장실 옆에 서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미루나무 밑에 다다랐다. 눈밭이고 뭐고 가릴 것이 없이 그냥 풀썩 주저앉았다.
손과 발은 얼어서 감각이 없었으나, 몸에서는 땀이 범벅이고, 얼굴은 화끈거리고 있다.
기와집 흙 담장을 손으로 짚어가면서,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젖은 옷을 벗고,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아랫목에 누었다. 얼마를 잤는지 모르겠다.
밖에는 그렇게 쏟아지던 눈은 온데간데없고, 햇살이 내리 쏟는다. 눈이 부셔 가까운 곳을 바라 볼 수가 없다.
아마도 만 하루를 잠들어 있었는가보다. 어제 귀신에 홀려 길을 잃고 헤맸던, 그 악몽 같은 사건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싫은 것이다.
의식적으로나마 어제의 일을 잊으려 하면서 잠깐이라고 생각하는 시간이 지났다, 잠깐이 이틀이다. 이틀 만에 그 많던 눈이 모두 없어졌다. 봄눈은 이래서 맥을 못 추는 것이다.
눈이 모두 녹아버리자, 그 눈 속을 헤매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일도, 눈처럼 녹아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듯이 일상이 계속된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쏟아 질 때면 늘 생각나는, 60년대 청소년기에 겪었던, 눈과의 사투 ! 그 사건이 언제나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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